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뤼흐 스피노자 (문단 편집) == 영향과 평가 == 스피노자의 저서들은 교황청에 의해 전부 금서로 지정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체제 전복적이라고 간주되었고, 스피노자의 견해를 반박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의 사상에 감히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동시대의 저술가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사상을 존경했으며 그의 생전에도 그의 저서에 대해 함께 논의했던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그의 『유고집』 출간을 준비했던 친구들이었다. 대개는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당국의 감시를 피해, 그들은 스피노자 사후 몇 년간 스피노자주의의 씨앗을 계속해서 확산시켜 나갔다. 대부분은 『신학정치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계시 종교와 기존 종교 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논의에 근거로 제시되었다. 『에티카』에서의 논증은, 내재적 신, 결정론적 세계 및 자연주의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어 자유사상가 집단 사이에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물론 주류가 아니었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17세기 후반 근본적 사유의 은밀한 흐름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어쨌든 스피노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스피노자주의'는 체제 전복적 무신론을 가리키는 비난의 용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사상은 유럽 전역에 퍼져서 '급진적 계몽 운동'을 고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Jonathan Israel, 『급진적 계몽 운동』,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ⅳ.] 은밀하지만 널리 확산된 이 운동은 계시 종교와 교회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정치권력, 시민 평등 및 심지어 성 역할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사유의 자유를 고취시켰다.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은 이러한 '급진적 계몽운동'을 더 친숙하고 고귀한 프랑스 계몽 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그리고 근대성 자체의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초 자료를 상세하게 독해할 경우, 적어도 내가 보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주의가 사실은 모든 곳에서, 즉 네델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및 스칸디나비아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유럽 급진적 계몽 운동의 지적 중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 집단의 사람들의 저서에서 『에티카』나 『신학정치론』의 고유한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스피노자라는 이름과 관련있는 두 명의 다른 철학자들, 즉 라이프니츠와 베일에 관한 한, 상황은 전혀 다르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보다 어린 동시대 사람으로, 광학에 관해 스피노자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는 1672년에 파리에 살면서 스피노자의 친한 친구가 되었고, 스피노자의 신망을 얻었으며 아직 출간되지 않은 『에티카』 일부의 원고 사본을 가지고 있던 치른하우스라는 이름의 동료로부터 스피노자의 사상을 더 상세히 배우고자 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죽고 유고집이 풀간되자마자 그 복사본을 곧바로 읽었다. 그는 이 사상이 위험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상들의 혼합물이라고 한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결코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었지만, 형이상학적 숙고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피노자의 급진적 사상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섰다. 예를 들어, 베더코프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를 보면, 라이프니츠는 완벽한 필연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훗날 그는 그의 이러한 견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창조에 대한 그의 설명은 위험하게도 그러한 결론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말년에, 기독교의 독단적 교의와 기독교의 미스테리를 철학적 비판의 공격으로부터 구하는 자신의 과업에 점차 헌신하게 되면서, 그는 오히려 스피노자와 그의 학설에 대한 초기의 열정적 관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악명 높은 급진적 사상과 지나치게 가깝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입장에서 종종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로테르담에서 살았던 피에르 베일은 17세기 후반 가장 독자층이 넓었던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는 여전히, 심지어 오늘날 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를 바로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흥미롭지만 난해한 방식으로 그가 저술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대한 베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첫째로, 1697년 『역사적 비평적 사전』을 출간하였으며, 거기에는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에 관한 매우 긴 항복이 수록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그 항목은 스피노자의 역설적 사상을 반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 『에티카』를 읽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스피노자의 체계를 더 잘 알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피노자의 영향에 관한 이야기에서 베일이 역할을 맡았던 두 번째 방식은 그가 사전에서 뿐만아니라 그의 초기 저작에서도 제시했던 전기적 설명에서 유래한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로, 확실히, 그러나 '유덕한 무신론자'로 묘사되었다. 무신론자가 공동체에서 관용될 수 있는지에 관해 그 당시에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했던 가정은, 무신론자는 벌을 두려워하거나 사후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서약을 위반하고 거짓 증언을 하면서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일은 도덕적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간 무신론자의 예로 스피노자를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스피노자는 호의적인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로서, 무신론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삶이 근거로 제시되고 인용되었다. 18세기 초, 『신학정치론』은 에티카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신학정치론』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및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도처에서 수많은 반박이 제기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에티카』는 라틴어와 네델란드어로만 존재했으며, 비록 원어로 된 『유고집』을 유럽 전역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에티카』의 내용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지식을 2차 자료, 특히 베일의 『역사적 비평적 사전』에서 얻었다. 보통 [[이신론|이신론자]]로 확인되는 영국의 몇몇 자유사상가들은 『에티카』의 학설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톨랜드는, 『에티카』에서 옹호된 것과 같은, 신과 자연 전체를 동일시하는 학설을 지칭하기 위해 1705년에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비록 '스피노자주의'처럼 거부의 용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신론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용어였지만, 이후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약칭하는 방식이 되었다. 『에티카』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스피노자 사상의 생명력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또 다른 사상가에는 앙리 꽁트 드 부렝빌리에가 있다. 그는 『신학정치론』과 『에티카』를 연구함으로써 스피노자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비록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에티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레기(Regis)의 비판에 맞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 훗날 「형이상학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그 에세이에서 그는 『에티카』의 학설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원고 형태로 돌아다녔지만, 부렝빌리에 사후 9년 째 되던 해인 1731년에, 스피노자를 비판하는 글을 함께 덧붙여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오류에 대한 반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프랑스어권 유럽 전역에 스피노자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알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볼테르]]는 훗날 『반박』에서 부렝빌리에가 '독을 주입하고는 해독제 주입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프랑스 계몽운동의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철학자들에게 점차적으로, 그러나 끊임없이 침투되어 그들에게 영향력을 과시했다. 스피노자주의와 프랑스 유물론자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라 메트리]]의 사상 내지 백과전서파 [[드니 디드로|디드로]] 사이의 중요한 개념적 유사점 외에도, 우리는 [[장 자크 루소|루소]]의 『에밀』에 있는 사부아르 신부의 고백 속에서 스피노자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 사상은 또한 유럽 전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 발생하는 여러 정치적 논의 속에서 언급되었다. 비록 [[존 로크|로크]]가 미국 독립혁명을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주요 원천이긴 하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개인 도서관에는 스피노자의 저작들 ㅡ 『신학정치론』과 『유고집』 ㅡ 이 소장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크리스찬 볼프의 철학을 둘러 싼 논란의 맥락에서 상당히 자주 논의되었다. 볼프는 할레 대학 교수로, 그의 적대자들에게는 의심을 살만한 정도로 스피노자주의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던 체계적인 형이상학적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1723년 왕의 명령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사실 스피노자보다 라이프니츠에 더 가까웠지만, 논란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볼프에 대한 비난은 스피노자의 견해에 주목하게 했고 원문에 대한 더 진지한 연구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볼프의 추방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성서의 텍스트로부터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것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할 목적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베르트하임 바이블』이 요한 로렌츠 슈미트에 의해서 저술되었다. 볼프는 사적으로 슈미트를 지지했으며, 따라서 『베르트하임 바이블』은 볼프 철학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의혹이 만연해 있었다. 적대자들은 이러한 독해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과 그것의 자연주의적 성서 비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예상은 맞았고, 슈미트는 1744년 『에티카』의 독일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슈미트 번역본의 출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66년 앞서 『유고집』 원본과 동시에 출간된 네덜란드어본 이래 유럽 언어로 처음으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출간된 『에티카』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에티카』 독일어 번역본은 수 세대에 걸쳐 독일의 철학자들에게 스피노자 체계를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트홀드 에프라임 레싱은 시인, 극작가 비평가 및 독일 계몽주의 시대에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종교적 관용과 사상의 자유 지지자였던 그는 이러한 주제들로 대중적이고 시대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희곡을 썼다. 그 또한 볼프 철학을 포용하면서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던 모제스 멘델스존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레싱 사후, 철학자이며 서로 아는 친구인 야코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 : 독일의 철학자.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되어 허무주의에 빠지므로,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지각, 즉 직관을 통해서 믿어져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독일 지성계에 '범신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피노자 사상 부활의 시발점이 된다.]는 멘델스존에게 레싱과 가졌던 대화에 대해 말해주었다.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그에게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친구 레싱이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는 오명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않았고 그 둘 사이에 논쟁이 펼쳐졌다. 멘델스존은 스피노자주의가 아니었고 전통적인 종교를 옹호했지만,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한에서 스피노자를 지지했다. 하지만 야코비는 이성은 스피노자의 신 이외의 어떠한 신으로도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없으며, 이러한 철학자의 신은 전혀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필사의 도약'으로 이성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범신론 논쟁'''으로 불리는 것으로, 사상계는 도처에서 격렬한 찬반 논의가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의 철저한 검토와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가장 열정적인 스피노자 지지자들 중에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독일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가 있다. 잘 알려진 몇몇 구절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유고집을 읽었을 때의 갑자기 밀려들었던 숭고한 느낌을 표현하기도 했다. "스피노자의 고요함은 전방위적인 나의 노력에 대비되어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그의 수학적 방법은 관찰과 묘사의 나의 시적 방식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도덕적 주제에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형식적 처리방식이 바로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그에게서 배우게 했던 것이며 그를 더욱더 칭송하게 만든 것이다." 괴테에게 영향을 받았던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몇몇 구성원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가지 측면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초기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일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간주했던 기성 세대의 견해를 뒤집어 버렸다. 반대로 노발리스는 스피노자가 "'''신에 취한 사나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에게 스피노자는 큰 영향을 끼쳤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셸링]]은 모두 스피노자에 대해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헤겔은 스피노자의 입장을 필연적 출발점으로서는 받아들였지만, 결국 수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자기-의식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주목할만 하다. 한때는 그의 사상이 반박의 목적으로만 언급될 수 있었지만, 그는 이제 근대의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재평가는 주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대륙을 가로질러 영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영어권 나라들에 스피노자를 새롭게 소개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는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였다. 콜리지 덕분에 스피노자 사상은 낭만파의 [[윌리엄 워즈워스|워즈워스]]와 그 밖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 스피노자에 첫 번째로 열광했던 사람들이 시인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콜리지도 워즈워스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각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자연의 동일시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기하학적 설명에 강한 흥미를 느꼈으며 스피노자의 단순하고 유덕하고 지적으로 풍부한 삶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프리드리히 니체|니체]]가 『에티카』를 처음 접했을 때, "그는 선구자, 진정한 선구자!"라고 선언한 것도 유명하다. 니체는 친구 오버베크에게 흥분된 상태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짧은 편지를 썼다. [[지그문트 프로이트|프로이트]]도 스피노자 독해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앙리 베르그송|베르그송]]은 스피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자에게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다." 비슷한 시기에 [[버트런드 러셀]]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그를 따라갈 철학자는 없다."[*원문 Intellectually, some have surpassed him, but ethically he (Spinoza) is supreme][* 러셀의 스피노자에 대한 평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에 대한 평과 대비된다.] 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0년대 후반 마르시알 게루를 필두로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질 들뢰즈]]와 A. 마스롱,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스피노자 철학은 더 이상 데카르트 철학의 계승이거나 헤겔의 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 중심의 근대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비근대적' 사유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루이 알튀세르|알튀세르]]나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스피노자야말로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유물론자다. "그는 신에서 시작했지만, 실제로 그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마치 자기가 자신의 적인 양 거기(적의 사령부)에 자리잡았고, 따라서 그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혐의를 받지 않으면서, 마치 점령군의 대포를 점령군 자신을 향해 돌려놓는 것처럼 적의 이론적 요새를 완전히 놀려놓는 방식으로 재배치하였다."[* 알튀세르,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이들에게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삶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들뢰즈)으로, 그리고 대중 자신의 지성과 능력으로부터 자유의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구성의 정치학'(네그리)으로 새롭게 태어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